[이코노미세계] 암막 커튼이 걷히면 빛바랜 사진들이 영화 필름처럼 이어진다. 스크린에는 과거 이곳에 주둔했던 미군 부대의 연혁과 장병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전시를 모두 둘러본 관람객은 마지막 공간에서 한 편의 영화 주인공처럼 기념사진을 남긴다.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있는 옛 미군기지 캠프그리브스가 역사와 문화, 체험을 결합한 관광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군사시설로 사용됐던 창고는 1950년대 미국 영화관을 본뜬 전시관으로 변신했다. 전쟁과 분단의 흔적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람객이 당시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역사를 체감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는 옛 미군기지인 캠프그리브스를 알리기 위해 기지 내 창고를 리모델링한 홍보전시관 ‘더 그리브스(The Greaves)’를 1일 공식 개관했다.
더 그리브스는 유물과 사진을 진열하는 일반적인 전시 방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영화가 시작되고 끝나는 것과 같은 이야기 구조를 갖췄다. 전시 동선은 ‘오프닝’과 ‘하이라이트’, ‘엔딩’ 등 3단계로 이어진다. 관람객이 한 편의 고전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느끼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캠프그리브스는 민통선 내 유일한 반환 미군기지이자 과거 미군의 주둔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문화 공간이다.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마친 뒤에는 분단의 역사를 돌아보고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관광지로 활용돼 왔다.
이번 홍보전시관 개관은 캠프그리브스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보다 친숙한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한 시도다. ‘미군기지’라는 공간적 특성과 ‘1950년대 미국 영화관’이라는 문화적 이미지를 결합해 관람객의 관심을 끌고, 자연스럽게 기지의 역사를 이해하도록 했다.
오랜 시간 군사시설로 사용된 건축물 자체도 전시의 한 부분이다. 새 건물을 짓는 대신 기존 창고를 리모델링해 공간에 남아 있는 시간의 흔적을 살렸다. 과거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됐던 장소가 역사와 문화, 관광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전환됐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전시관 명칭인 ‘더 그리브스’에는 캠프그리브스의 과거와 현재를 한자리에서 보여주겠다는 의미가 담겼다. 관람객은 전시 공간을 따라 이동하며 미군기지 시절의 흔적을 살펴보고, 오늘날 평화관광지로 변화한 캠프그리브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전시의 출발점인 ‘오프닝’ 공간은 전체 전시의 분위기와 내용을 소개하는 프롤로그 역할을 한다. 1950년대 미국 극장 입구를 재현한 매표소와 매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극장에 영화를 보러 온 듯한 분위기를 연출해 본격적인 역사 전시를 관람하기 전 당시의 문화적 감성을 먼저 경험하도록 했다. 레트로풍 소품과 공간 디자인은 캠프그리브스의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도 부담 없이 전시에 접근하도록 돕는다.
오프닝 공간을 지나 암막 커튼을 통과하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밝고 화려한 극장 입구에서 과거의 기록을 마주하는 역사 공간으로 관람객을 이끄는 장치다. 커튼 너머에서 시작되는 전시는 관람객이 시간의 경계를 넘어 과거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설계됐다.
전시관이 영화관을 주제로 삼은 것은 단순히 시각적 재미를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관람객이 수동적으로 설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며 캠프그리브스의 역사를 하나의 서사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가족 단위 방문객 등 역사 전시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도 영화라는 친숙한 형식을 통해 캠프그리브스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시의 중심은 ‘하이라이트’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캠프그리브스에 주둔했던 미군 부대의 연혁과 장병들의 생활상을 사진과 영상으로 보여준다.
전시 공간은 영화 필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꾸며졌다. 당시 미군들의 일상과 기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은 필름 프레임처럼 길게 이어진다. 각각의 사진은 캠프그리브스가 군사기지로 사용됐던 시절의 풍경과 그 안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전달한다.
역사적 공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공식적인 연혁과 사건만큼 중요한 것이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이다. 전시관은 미군 장병들의 생활 모습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캠프그리브스를 추상적인 군사시설이 아닌, 사람들이 생활했던 구체적인 장소로 보여준다.
관람객은 공간 안에 마련된 영화관 의자에 앉아 빔프로젝터로 상영되는 영상도 볼 수 있다. 영상에는 과거 캠프그리브스에 주둔한 부대의 연혁과 기지의 옛 모습이 담겼다. 관람객이 마치 고전영화를 감상하듯 캠프그리브스의 시간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사진과 영상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전달한다. 사진이 특정 순간을 정지된 기록으로 보여준다면, 영상은 여러 장면과 설명을 연결해 캠프그리브스의 변화 과정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영화관 좌석에 앉아 역사를 감상하는 방식도 관람객의 집중도를 높이는 요소다.
전시의 마지막인 ‘엔딩’ 공간은 관람객 참여형으로 꾸며졌다. 실제 극장의 마지막 장면처럼 연출된 공간에서 관람객은 전시를 되돌아보고 여운을 느낄 수 있다.
전시관은 포토존도 마련했다. 관람객이 단순한 구경꾼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 오프닝에서 시작해 하이라이트를 거쳐 엔딩에 이르는 전시의 서사는 관람객의 참여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체험과 사진 촬영을 결합한 공간은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관광지로서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는 구성이다. 관람객이 전시 경험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공유하도록 함으로써 캠프그리브스를 자연스럽게 알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더 그리브스가 지향하는 핵심은 ‘기억하기 어려운 역사를 기억하고 싶은 경험으로 바꾸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 군사시설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영화와 레트로 문화라는 친숙한 형식으로 풀어내 관람객의 접근성을 높였다.
DMZ 일원의 관광은 그동안 전망대와 안보 현장, 군사 유적 등을 둘러보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더 그리브스는 여기에 역사적 서사와 문화적 체험을 더했다. 관람객이 공간을 이동하면서 보고, 듣고, 사진을 찍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관광 콘텐츠가 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캠프그리브스의 장소성을 활용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어디서나 재현할 수 있는 일반적인 전시가 아니라, 실제 미군기지였던 장소에서 당시의 사진과 영상을 만난다는 점이 전시의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기존 군사시설을 문화 공간으로 재활용한 것은 캠프그리브스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분단과 대치의 현장이었던 장소가 현재는 역사 교육과 문화 체험, 평화관광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그리브스가 캠프그리브스의 역사적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면서도 관람객의 흥미를 꾸준히 이끌어내려면 전시 자료와 콘텐츠를 지속해서 보완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과 교육 프로그램을 연계하고, 캠프그리브스의 변화 과정과 DMZ의 역사적 맥락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노력도 중요하다.
경기도는 이번 전시관이 역사 교육과 관광 체험을 동시에 제공하는 DMZ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캠프그리브스 운영시간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에는 문을 닫는다.
철조망과 군사시설로 기억되던 공간에 이제는 극장의 조명이 켜졌다. 더 그리브스의 스크린에 오르는 작품은 허구의 영화가 아니다. 캠프그리브스가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 남겨진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과거를 돌아보고 평화를 생각하는 관람객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코노미세계 / 오정희 기자 oknaj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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