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지원청·기초지자체 지역별 5대 특화과제 마련해 공동 추진
역할·예산·일정·성과지표까지 담아 ‘실행하는 협약’으로
[이코노미세계] “왜 아이의 하루에는 벽이 없는데, 어른의 행정에는 벽이 있는가.” 안민석 경기도교육감이 경기교육의 새로운 화두로 ‘벽깨기’를 꺼내 들었다.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교육청과 도청 사이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행정의 경계를 허물고 지역 전체를 하나의 교육공동체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그 출발점은 거창한 정책 용어가 아니라 현장에서 품었던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집을 나서 시·군이 관리하는 도로와 건널목을 지나 교육청 관할의 학교로 들어간다. 방과 후에는 다시 마을의 도서관과 체육시설, 문화시설을 이용한다. 아이들의 일상에는 행정기관을 구분하는 경계가 없지만, 정책과 예산을 집행하는 행정에는 기관별 칸막이가 존재해 왔다.
안 교육감이 문제 삼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교육을 학교와 교육청만의 영역으로 한정하지 않고 지방정부와 지역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로 바꾸자는 것이다.
경기도와 경기도교육청, 도내 31개 시·군이 한자리에서 뜻을 모은 ‘벽깨기’ 협약은 이런 구상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옮기는 첫걸음이다.
협약의 무대가 된 곳은 오산 원동초등학교 체육관이다. 안 교육감에게 오산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자신이 성장한 지역이면서 약 20년 전부터 교육과 지방행정 사이의 경계를 고민하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안 교육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동초등학교 체육관에 선 소회를 전하면서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로 이번 협약의 의미를 압축했다.
안 교육감이 ‘벽깨기’를 필생의 화두로 삼게 된 것은 약 20년 전 오산에서 품은 의문에서 시작됐다. 아이들이 매일 오가는 공간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 이를 관리하는 행정기관은 각각 다르다는 점이었다. 학교 밖 건널목은 지방자치단체의 영역이고, 교문 안 교실은 교육청의 영역이다.
아이의 성장과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생활공간이지만 행정적으로는 기관과 예산, 사업 주체가 달라진다. 이 때문에 지역과 학교가 협력해야 하는 사업에서 칸막이가 생기고 정책 추진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벽깨기’ 구상의 문제의식이다.
안 교육감은 이를 “아이는 나뉘지 않는데 행정은 나뉘어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벽깨기’가 단순히 학교 담장을 개방하자는 의미에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가진 인적·물적 자원을 공유하고 지방정부와 교육행정기관이 공동으로 정책을 설계하는 협력체계를 만들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안 교육감은 이를 ‘줄탁동시(啐啄同時)’에 빗댔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면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동시에 밖에서는 어미 닭이 같은 지점을 쪼아야 한다는 의미다.
학교가 안에서 변화를 요구하고 지역사회와 지방정부가 밖에서 동시에 움직일 때 비로소 행정의 벽을 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협약 장소로 원동초등학교가 선택된 것도 상징적이다. 안 교육감에 따르면 학교에 수영장이 필요하다는 요구와 지역사회의 협력이 맞물리면서 이곳에는 학생과 주민이 함께 사용하는 시설이 만들어졌다. 현재 해마다 13만 명이 넘는 주민이 이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생존수영을 배우고 주민들도 학교시설을 생활체육 공간으로 활용한다. 학교시설을 학생만 이용하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보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학생 안전과 교육활동을 보장하면서도 지역주민과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생활 인프라로 확장한 사례다.
안 교육감이 도내 시장·군수들에게 이 현장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시설 하나를 함께 사용하면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설을 별도로 건립해야 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고 학교 역시 지역사회와 연결될 수 있다. 주민에게는 가까운 생활시설이 생긴다. ‘학교도 살고 마을도 산다’는 벽깨기의 구상이 실제 공간에서 구현되는 셈이다.
이번 협약의 또 다른 의미는 참여 범위다. 도청과 도교육청뿐 아니라 31개 시·군, 교육지원청까지 함께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시장·군수와 교육장들이 협약에 참여하고 안 교육감도 31장의 협약서에 서명했다.
협약식에서는 협약이 체결될 때마다 화면 속 경기도 지도에 불이 들어오는 방식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안 교육감은 이를 아이들이 건너야 하는 신호등에 비유했다. 한쪽에서는 녹색불이 켜졌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빨간불이 켜지는 식의 행정 엇박자를 줄이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정책에는 행정기관들이 함께 ‘그린 라이트’를 켜야 한다는 의미다.
그동안 지방정부와 교육청의 협력은 개별 사업이나 지역 현안에 따라 추진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벽깨기 정책은 이를 보다 상시적인 협력구조로 발전시키겠다는 데 의미가 있다.
아울러 벽깨기는 선언에만 머물지 않는다. 경기도교육청은 협약을 통해 ▲폰-프리(Phone-Free) 문화 확산 ▲RAS(Reading·Arts·Sports) 인성교육 활성화 ▲학교와 지역 인프라 공유 및 벽깨기협력관 운영 ▲교육예산 두 배 확충 및 교육자치 공동 실현 ▲경기 황금 계획(Gyeonggi Golden Plan·GGP) 학교복합시설 협력 등 5대 공통과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눈에 띄는 것은 교육 문제를 학교 내부에 국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폰-프리 문화와 독서·예술·체육을 중심으로 한 RAS 인성교육부터 학교시설과 지역 인프라 공유, 예산과 교육자치, 학교복합시설까지 협력 범위를 넓혔다.
학생들의 생활과 교육환경 전반을 지방정부와 교육청이 함께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방향성이 읽힌다. 특히 학교와 지역 인프라 공유는 벽깨기의 성패를 가를 핵심 분야로 꼽을 수 있다. 지역에는 도서관과 체육관, 공연장, 공원 등 다양한 공공시설이 있고 학교 역시 체육관과 운동장, 도서관 등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다.
각 기관이 시설을 별도로 운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서로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교육과 지역생활 인프라를 동시에 확충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번 구상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31개 시·군에 획일적인 정책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육지원청과 기초지자체가 각 지역의 여건과 교육 현안을 반영해 별도의 5대 특화과제를 선정하도록 했다.
도시 규모와 인구구조, 학교 수, 교육시설, 교통환경 등이 서로 다른 만큼 지역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사업을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실행계획이다. 지역별 특화과제에는 역할과 예산, 일정, 성과지표 등을 담은 실행계획을 수립해 공동 추진하도록 했다. 단순한 업무협약(MOU)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정책 집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장치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통상 기관 간 협약은 선언적 수준에서 끝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협약 당시에는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구체적인 예산과 책임 주체가 정해지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추진 동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교육감 역시 이를 의식한 듯 “협약서들은 액자로 걸어 두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결국 벽깨기의 평가는 협약의 규모가 아니라 앞으로 31개 시·군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사업으로 구현되는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어 정책을 현장에서 연결할 ‘벽깨기협력관’의 역할도 주목된다. 안 교육감은 협약 이후 벽깨기협력관들이 경기도 각 시청과 군청, 의회를 찾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학교와 교육지원청, 지방정부, 지방의회 사이를 연결해 지역별 협력사업을 발굴하고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벽깨기가 교육청 내부 정책만으로 추진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학교시설을 지역사회와 공유하거나 새로운 복합시설을 조성하려면 지방정부의 도시계획과 재정, 지방의회의 예산 심의 등 여러 행정 과정이 맞물려야 한다. 교육청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 적지 않다.
반대로 지방정부가 추진하는 돌봄·문화·체육·청소년 정책 역시 학교와 연결될 경우 활용도와 정책 효과를 높일 여지가 있다.
결국 협력관이 기관 사이의 이해관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조율하고 실제 공동사업을 만들어내느냐가 향후 정책의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학교시설 개방에는 풀어야 할 과제도 있다. 지역주민의 학교시설 이용이 확대될수록 학생 안전과 시설관리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 교육감도 “학교도 문을 열겠다”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안전 울타리는 더 단단히 지키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벽깨기의 중요한 원칙이 될 수밖에 없다.
학교를 지역사회에 개방하는 것과 학생들의 교육권·안전권을 보호하는 문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설 이용 시간과 동선 분리, 출입 관리, 관리인력과 운영비용 분담 등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세부적인 과제도 뒤따른다.
따라서 향후 지역별 실행계획이 마련되는 과정에서는 시설을 얼마나 많이 개방하느냐뿐 아니라 학생 안전을 어떻게 확보하고 학교의 관리 부담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도 구체적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벽깨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교육의 책임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그동안 학교교육의 주된 책임이 교육청과 학교에 집중됐다면 앞으로는 지방정부와 지역사회가 교육의 한 축으로 적극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저출생과 학령인구 감소, 지역 간 교육격차 등 교육을 둘러싼 환경이 빠르게 달라지는 상황에서 학교만으로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 수요를 모두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지역사회에는 학교가 갖지 못한 다양한 공간과 인적자원이 존재한다. 학교와 지역이 서로 가진 자원을 연결한다면 학생들에게는 교육의 공간이 넓어지고 주민들에게는 공공시설 활용 기회가 확대될 수 있다. “경계를 허물면 우리 아이들에게 온 마을이 학교가 된다”는 안 교육감의 구상이 향하는 지점이다.
이번 협약으로 경기도교육청의 벽깨기는 이제 선언의 단계를 넘어 실행이라는 시험대에 올랐다. 지역마다 교육환경과 재정 여건이 다른 만큼 추진 속도와 사업 내용 역시 달라질 수 있다. 교육청과 지방정부 사이에 예산 분담이나 시설관리 등을 둘러싼 이견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안 교육감 역시 지역마다 속도와 방향은 다를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머뭇거리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협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정책의 성패를 판단할 기준도 분명하다. 31개 시·군이 협약서에 서명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지역별 특화과제가 실제 예산으로 연결되는지, 학교와 지역의 시설 공유가 얼마나 확대되는지, 학생과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교육지원청과 지방정부가 수립할 실행계획에 역할·예산·일정뿐 아니라 성과지표를 포함하기로 한 만큼 향후 그 결과를 객관적으로 공개하고 평가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오산 원동초등학교에서 출발한 ‘벽깨기’는 이제 경기도 31개 시·군으로 무대를 넓혔다. 학교의 문을 지역사회에 열고 지방정부는 교육의 문을 함께 두드리는 새로운 협력 실험이다.
안 교육감이 20년 전 오산에서 던졌다는 질문, “왜 아이의 하루에는 벽이 없는데 어른의 행정에는 벽이 있는가”에 경기교육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협약서 31장에 찍힌 서명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행정의 벽을 실제로 얼마나 낮추고, 그 빈자리를 학생과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교육과 생활의 공간으로 채워나가느냐가 ‘벽깨기’ 정책의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이코노미세계 / 김장수 기자 bmk88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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