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황금빛으로 물든 경기 이천시 장록동 들녘에 콤바인 엔진 소리가 울렸다. 한여름 폭염과 가뭄을 견뎌낸 벼가 마침내 수확의 시간을 맞았다.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마다 벼가 쓰러지고 알곡이 차곡차곡 쌓였다. 단순한 한 해 농사의 결실만은 아니었다.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환경 변화 속에서도 논을 지켜낸 농민들의 땀과 인내가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성수석 이천시장은 장록동 들녘에서 대월농협과 함께 올해 첫 벼베기에 나섰다. 직접 콤바인 핸들을 잡고 황금빛 논을 가르며 수확 현장을 살폈다. 성 시장은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첫 벼베기 소식을 전하면서 “이천의 자부심을 다시 느꼈다”고 밝혔다.
올해 첫 벼베기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유난히 혹독했던 여름 때문이다. 연일 이어진 폭염과 가뭄에도 벼는 알차게 여물었다. 그 뒤에는 새벽마다 물꼬를 살피고 메마르는 논에 물을 대며 여름 내내 들녘을 지킨 농민들이 있었다. 성 시장은 “하늘이 어려울수록 사람의 정성이 깊어진다는 것을 오늘 수확한 벼 이삭 한 줌이 증명하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이천에서 벼베기는 단순한 농작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쌀의 고장이라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수확 현장에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첨단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의 산업구조가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이천쌀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도시가 미래로 나아가면서도 놓쳐서는 안 될 뿌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올여름 농촌이 맞닥뜨린 가장 큰 변수는 날씨였다. 벼농사는 기온과 강수량, 일조량 등 자연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특히 폭염과 가뭄이 장기간 이어지면 농민들은 논의 수분 상태와 벼 생육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장록동 들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논을 지켜야 했고 물 부족에 대한 걱정도 이어졌다. 하지만 농민들은 물꼬를 살피고 논에 물을 공급하면서 벼가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들녘을 지켰다. 그렇게 지켜낸 벼가 고개를 숙이고 첫 수확을 맞았다.
수확된 벼 한 줌에는 한 농가의 노력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모내기에서 생육 관리, 물 관리, 병해충 관리와 수확까지 수개월에 걸친 과정이 이어져야 비로소 한 해 농사가 완성된다. 특히 기후 여건이 불안정해질수록 농민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은 커진다.
성 시장이 첫 벼베기 현장에서 주목한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는 폭염과 가뭄 속에서도 농민들이 새벽마다 물꼬를 살피며 들녘을 지켰다는 점을 강조했다. 행정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결국 논에서 벼를 키워내는 마지막 힘은 농민들의 손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이천의 들녘에서 시작된 올해 첫 수확은 그래서 ‘풍년’이라는 결과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기후환경 속에서 농업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질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성 시장은 이천 농업을 설명하면서 ‘성실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뜨거운 땅을 원망하지 않고 끝내 결실로 답하는 성실함. 그것이 이천 사람의 힘이고, 이천쌀 650년 명성의 뿌리”라고 밝혔다.
이 표현에는 이천쌀의 명성을 단순히 품질이나 브랜드 가치만으로 바라보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랜 시간 농업을 이어온 사람들과 지역사회가 축적해온 경험과 노력이 오늘날 이천쌀의 경쟁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역 특산물이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품질뿐 아니라 그 상품이 지닌 이야기와 지역성이 중요하다. 이천쌀 역시 ‘이천에서 생산되는 쌀’이라는 지리적 의미를 넘어 지역의 역사와 농업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자산으로 자리 잡아왔다.
도시가 성장할수록 이런 지역 정체성의 가치는 오히려 중요해진다. 산업시설과 아파트, 도로가 늘어나면서 도시의 외형은 빠르게 바뀔 수 있지만 그 도시만의 역사와 문화는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650년이라는 시간이 언급되는 이천쌀의 명성은 이천이 다른 도시와 차별화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첨단산업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전통 농업을 어떻게 보존하고 새로운 산업과 연결할 것인지가 향후 도시 경쟁력을 좌우하는 또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
현재 이천을 이야기하면서 반도체를 빼놓기 어렵다. 그러나 성 시장은 첫 벼베기 현장에서 도시의 미래 산업과 전통 농업을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반도체가 이천의 미래를 이끈다면, 쌀은 이천의 정체성을 지킵니다.” 이 한 문장 안에 이천이 안고 있는 도시 발전의 방향성이 압축돼 있다.
첨단산업은 일자리와 투자, 도시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 반면 농업과 농촌은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 환경과 경관을 유지하는 기반이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을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두 영역이 함께 도시의 경쟁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이천만의 문제도 아니다. 수도권 외곽 지방자치단체들은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개발 수요가 커질수록 농지는 줄어들 가능성이 높고, 농촌 인구의 고령화와 인력 부족 문제도 심화될 수 있다.
반대로 농업을 과거 산업으로만 인식한다면 지역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브랜드와 문화적 자산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이천이 주목받는 이유는 첨단산업과 전통 농업이라는 성격이 뚜렷하게 다른 두 산업이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생산시설이 미래 산업도시 이천을 상징한다면 황금빛 논과 이천쌀은 도시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준다.
성 시장이 “첨단도시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도 이 들녘의 땀을 잊지 않겠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도시의 성장 속도가 빨라질수록 농업의 가치를 행정에서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단순히 농지를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농업의 생산성과 소득을 높이고 농촌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정책이 병행돼야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번 첫 벼베기 현장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농업재해 대응이다. 성 시장은 “폭염 속 영농 지원과 농업재해 대응에 시정의 힘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기후변화가 농업 현장에서 체감되는 현실적 문제로 등장하면서 지방정부의 농업정책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농업정책이 생산 지원과 유통, 가격 경쟁력 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로는 이상기후에 따른 피해 예방과 신속한 대응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폭염과 가뭄, 집중호우 등 기상 여건의 변화는 농작물 생산량과 품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농업재해는 농가 한 곳의 손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생산량 감소가 이어지면 농산물 가격과 지역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역의 대표 농산물일수록 브랜드 신뢰와 공급 안정성 측면에서도 대응체계가 중요하다.
이 때문에 영농 현장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필요한 지원을 적기에 연결하는 지방정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농업인의 고령화가 진행되는 농촌에서는 개별 농가가 기후재해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행정과 농협, 농업 관련 기관이 유기적인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이유다.
이번 첫 벼베기에 대월농협이 함께한 것도 지역 농업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방정부와 농업 관련 조직, 농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천쌀이 가진 의미를 앞으로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도 과제다. 지역 농산물 브랜드의 경쟁은 이제 생산량과 품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소비자에게 어떤 가치와 이야기를 전달하느냐가 중요해졌다. 지역의 역사와 농업인의 이야기, 생산 과정의 신뢰성을 브랜드에 담아낼수록 경쟁력은 높아질 수 있다.
이천에는 이미 오랜 기간 축적된 ‘쌀의 고장’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여기에 첨단산업도시라는 새로운 도시 이미지가 더해지고 있다.
언뜻 상반돼 보이는 두 이미지를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이천만의 도시 브랜드가 만들어질 수 있다. ‘반도체와 쌀’은 전혀 다른 산업처럼 보이지만 도시 브랜드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강력한 대비가 될 수 있다. 최첨단 기술과 전통 농업이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는 모습 자체가 이천의 차별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업을 단순한 1차 산업에 머물게 하지 않고 관광과 체험, 문화, 유통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방향이다. 이천쌀이라는 높은 인지도를 지역경제 전반으로 확장한다면 농가소득뿐 아니라 지역 상권과 관광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첨부 자료는 구체적인 관련 사업이나 예산, 생산량·판매량 등의 수치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 이러한 부분은 향후 정책과 성과를 통해 확인해야 할 대목이다.
장록동 들녘에서 시작된 올해 첫 벼베기는 한 해 농사의 결실을 알리는 장면이지만 그 안에는 이천의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담겨 있다.
한쪽에서는 대한민국의 미래 산업을 이끄는 첨단산업이 성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농업이 황금빛 들녘을 지키고 있다.
도시는 변화해야 살아남는다. 그러나 변화한다고 해서 과거의 모든 것을 지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역만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키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는 도시가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이천의 경우 그 해답을 ‘반도체와 쌀의 공존’에서 찾을 수 있다. 첨단산업으로 일자리와 성장동력을 확보하면서 농업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를 지키는 것. 농업을 보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 도시의 한 축으로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기후변화는 새로운 시험대가 되고 있다. 폭염과 가뭄에도 벼는 여물었지만 매년 같은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다. 농민 개인의 경험과 희생만으로 기후위기를 견뎌내도록 해서는 지속가능한 농업을 기대하기 어렵다.
영농 지원과 농업재해 대응을 강화하겠다는 이천시의 약속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정책과 지원으로 이어지는지가 그래서 중요하다. 뜨거운 여름을 견뎌낸 벼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결실 뒤에는 새벽마다 물꼬를 살핀 농민들의 시간이 있었다.
첨단산업도시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이천에서 황금빛 들녘은 도시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반도체가 이천의 내일을 설계한다면 쌀은 이천의 어제를 오늘과 연결한다. 올해 첫 벼베기 현장에서 나온 “들녘의 땀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650년의 명성을 이어온 이천쌀이 기후위기와 도시화라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 그리고 첨단산업과 전통 농업이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도시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장록동의 황금빛 들녘이 이제 이천시에 그 답을 묻고 있다.
이코노미세계 / 김은주 기자 sweetmom5@naver.com
[저작권자ⓒ 이코노미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