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시장, 해마다 만나는 두 아이와 ‘성장의 약속’
[이코노미세계] 밤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서관. 책장 사이에서는 아이들이 보드게임을 하고 한쪽에서는 치킨과 피자를 나눠 먹는다. 공연을 즐기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꺼내 읽기도 한다. 평소라면 문을 닫았을 시간, 도서관은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진다.
경기 안성시 보개도서관의 ‘밤독깨비’가 만드는 풍경이다. 도서관은 대개 조용해야 하는 공간으로 여겨진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곳이라는 고정관념도 있다. 그러나 밤독깨비가 열리는 날만큼은 다르다. 밤 12시까지 도서관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고, 보드게임을 하고, 공연을 보고, 책을 읽는다. 매일 경험할 수는 없지만 일 년에 하루, 도서관이 시민들에게 색다른 공간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올해 밤독깨비를 찾은 김보라 안성시장에게는 행사의 즐거움과는 또 다른 특별한 기다림이 있었다. 매년 이곳에서 만나는 두 아이 때문이다.
김 시장은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밤독깨비에서 두 아이와 다시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올해도 행사장을 찾은 김 시장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올해도 왔을까.’ 기대를 안고 보개도서관 3층으로 올라간 김 시장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들어왔다. 만화책이 있는 곳, 늘 그 자리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김 시장을 기다렸다고 했다. 해마다 같은 장소에서 반복되는 만남이지만, 그 만남은 매번 달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두 아이는 어느새 4학년이 됐다. 축구선수로 뛰고 있다는 남자아이는 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함께 있던 여자아이에게서도 어느새 훌쩍 성장한 모습이 느껴졌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달력으로 보면 짧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일 년은 크다. 키가 자라고 얼굴이 달라진다. 관심사가 생기고 좋아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도 조금씩 달라진다. 밤독깨비에서 이어진 세 사람의 만남은 바로 그 변화를 한눈에 확인하게 해주는 작은 ‘성장의 기록’이 됐다.
세 사람이 만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도 있다. 보드게임이다. 김 시장은 올해도 새로운 보드게임을 준비해 갔다. 아이들과 함께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제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실력이 그만큼 늘었다는 이야기다. 달라진 것은 게임 실력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게임에서 지면 속상해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승패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어른에게는 별것 아닌 변화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는 의미가 있다.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결과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고, 패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성장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김 시장은 “게임 실력만큼 마음도 자란 모양”이라고 했다. 밤독깨비에서의 보드게임 한 판이 단순한 놀이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아이들은 해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어른은 그 변화를 기억한다. 그렇게 같은 장소에서 반복된 짧은 만남이 몇 년 동안 이어지면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함께 사진을 찍은 김 시장과 아이들은 올해도 헤어지기 전 약속했다. “내년에도 여기서 또 만나자.” 거창한 약속은 아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니다. 일 년 뒤 밤독깨비가 다시 열리면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는 약속이다.
그러나 매년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람의 생활은 바뀌고 관심도 변한다. 아이들은 특히 빠르게 성장한다. 그럼에도 세 사람의 만남은 이어지고 있다.
김 시장은 일 년에 한 번 같은 장소에서 아이들을 만나다 보니 성장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보인다고 했다. 매일 보는 가족은 아이가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일 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만나면 변화는 선명해진다.
키가 커지고 얼굴이 달라진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말투가 달라지며 마음도 단단해진다. 처음 만났을 때 2학년이던 아이들이 3학년이 되고 다시 4학년이 되는 동안 보개도서관은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켰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책을 보관하는 장소를 넘어 한 아이의 성장과 시민의 기억을 담아내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시장은 내년에는 아이들이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벌써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아이들의 만남을 ‘견우와 직녀’에 빗댔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처럼 세 사람도 일 년에 단 한 번, 보개도서관 밤독깨비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는 밤독깨비가 가진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행사는 하루지만 그 하루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일 년의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밤독깨비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것은 공공도서관의 역할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도서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책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필요한 책을 읽고 빌릴 수 있도록 하고, 학생들에게 학습 공간을 제공한다.
하지만 지역의 공공도서관은 점차 주민들의 일상과 가까운 생활문화 공간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밤독깨비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늦은 밤까지 도서관 문을 열고 책과 놀이, 음식, 공연을 하나의 공간에 담으면 시민들에게 도서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도서관에 대한 기억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조용히 책만 읽어야 하는 곳’에서 ‘친구와 놀고 공연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책도 만나는 곳’이 되는 것이다.
독서문화의 확산도 반드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게 하는 방식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을 친숙한 장소로 만들고 다시 찾고 싶은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 역시 책과 가까워지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밤독깨비가 주목받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밤 12시까지 도서관에서 놀 수 있다는 색다른 경험이 아이들을 도서관으로 이끌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책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치킨을 먹고 보드게임을 하는 모습만 떼어놓고 보면 기존 도서관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경험을 계기로 아이가 도서관을 즐거운 공간으로 기억하고 다시 도서관을 찾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도서관의 문턱을 낮추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밤독깨비의 또 다른 의미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다. 도시는 건물과 도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익히고 기억을 공유하면서 공동체가 형성된다.
지역 축제와 도서관, 공원, 체육시설 같은 공공 공간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우연히 만나고 다시 만난다. 아이들은 친구를 만들고 부모들은 이웃을 만난다.
김 시장과 두 아이의 인연 역시 그런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생겼다. 처음부터 특별한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밤독깨비라는 지역 행사가 있었고, 같은 공간을 찾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났다. 다음 해에 다시 만났고 또 그다음 해에도 만났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자랐고, 만남에는 이야기가 쌓였다. 지역 공동체의 관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대한 구호나 일회성 행사보다 같은 장소에서 사람들이 계속 만나고 서로의 변화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공동체 의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공도서관은 책을 매개로 사람을 연결하는 지역 공동체의 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 세대도 자연스럽게 섞인다. 어린아이와 청소년, 부모와 노년층이 같은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이용 목적은 서로 달라도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공유한다. 책을 빌리러 온 사람, 공부하러 온 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이와 부모가 한 공간에서 만난다. 밤독깨비는 이러한 도서관의 특성을 밤이라는 시간까지 확장한 행사인 셈이다.
축제와 행사는 대개 끝나는 순간 평가가 시작된다. 몇 명이 참여했는지,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했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성과도 있다. 누군가가 다음 행사를 기다리는지, 다시 그 장소를 찾고 싶은 기억을 얻었는지, 그곳에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졌는지 같은 것들이다.
밤독깨비에서 매년 만나는 김 시장과 두 아이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부분을 보여준다. 일 년에 하루뿐인 행사가 다음 해를 기다리게 했다. 아이들은 시장을 기다렸고 시장은 아이들이 올해도 왔을지 궁금해했다.
행사는 끝났지만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내년에도 여기서 또 만나자.” 짧은 한마디가 밤독깨비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도서관에서 만든 추억이 다음 해의 약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김 시장은 도서관에 대해 “책을 읽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추억을 만들고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는 곳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래서 밤독깨비의 밤은 조금 더 특별하다고 했다. 책을 읽는 공간이 사람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올해 밤독깨비도 끝났다. 도서관에서 먹던 치킨과 피자도, 공연도, 보드게임도 일 년 뒤를 기약하게 됐다. 하지만 두 아이와 김 시장 사이에는 이미 다음 만남을 위한 약속이 남았다.
내년이면 아이들은 또 한 살을 먹는다. 키가 더 커질 수도 있고 좋아하는 것도 달라질 것이다. 축구선수를 꿈꾸는 남자아이의 얼굴은 올해보다 더 까맣게 그을려 있을지 모른다. 보드게임 실력도 지금보다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일 년 뒤 밤독깨비가 다시 열리는 날, 누군가는 또 기대를 안고 보개도서관 3층으로 올라갈 것이다.
‘올해도 왔을까.’ 만화책이 있는 익숙한 자리에서 서로를 발견한다면, 네 번째 혹은 그다음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김 시장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다음을 기약했다. “얘들아, 내년에도 그 자리에서 만나자. 그때는 나도 보드게임 연습 좀 하고 갈게.”
이코노미세계 / 이주은 기자 pin827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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