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연인 함께 즐기는 수도권 문화관광지 각광
[이코노미세계] 한여름 피서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북적이는 해수욕장이나 유명 휴양지를 찾는 대신 숲과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고, 가까운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하루를 보내려는 여행객이 늘고 있다. 자연 속 휴식에 문화예술 체험을 더한 이른바 ‘문화 피서’다.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고도 몸과 마음의 여유를 함께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여름 여행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관광지는 이런 문화 피서의 매력을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울창한 숲과 시원한 계곡이 이어지는 가운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 가까이 자리 잡고 있다. 계곡을 따라 산책한 뒤 미술관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을 감상하고, 다시 숲길과 지역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 접근하기 쉬운 것도 장점이다. 숙박을 하지 않고도 여유 있게 자연과 예술을 즐길 수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은 물론 연인, 친구, 혼자 떠나는 여행객에게도 당일치기 나들이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장흥관광지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과 문화예술 공간이 서로 분리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숲과 계곡에서 보내는 시간과 미술관 관람이 하나의 여행 동선으로 이어진다. 오전에는 나무 그늘 아래를 걷고, 한낮에는 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작품을 감상한 뒤, 늦은 오후 다시 계곡 주변을 산책하는 일정도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여름철 계곡 여행은 물놀이와 음식점 방문에 집중되기 쉽다. 장흥에서는 여기에 미술관 관람이라는 선택지가 더해진다. 날씨가 덥거나 갑자기 비가 내리더라도 실내 전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은 자연 체험과 예술교육을 함께 즐길 수 있고, 미술 애호가는 작품 감상과 휴식을 한 번에 누릴 수 있다.
장흥의 두 시립미술관은 각기 다른 개성과 전시 방향을 보여준다. 장욱진미술관에서는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회화의 세계를, 민복진미술관에서는 재료와 형태를 탐구한 조각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회화와 조각, 완성된 작품과 창작 과정이 서로 대비되면서 관람의 폭을 넓힌다.
두 미술관을 함께 둘러보면 한국 근현대미술의 서로 다른 흐름을 한 공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장욱진이 일상과 자연을 자신만의 상징적 이미지로 압축했다면, 민복진은 다양한 재료를 실험하며 인간과 가족, 관계의 형태를 조각으로 구현했다. 서로 다른 장르와 표현 방식이지만 인간과 자연을 따뜻하게 바라봤다는 점에서는 맞닿아 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장욱진(1917~1990)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공간이다. 장욱진은 나무와 집, 가족, 새, 해와 달처럼 친숙한 소재를 단순하고 응축된 형태로 표현했다. 작은 화면 속에 일상과 자연, 인간에 관한 깊은 사유를 담아낸 작가로 평가받는다.
미술관 1층에서는 기획전 ‘보이는 선, 보이지 않는 결’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장욱진 회화의 조형 언어를 동시대 디자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장욱진을 비롯해 디자인 스튜디오 ‘슬기와 민’, 오화진의 작품 등 3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오는 8월 30일까지 이어진다.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선’과 ‘결’은 장욱진의 회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화면에 드러난 선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작가의 시선과 감정, 오랜 시간 축적된 조형적 고민이 배어 있다. 이번 전시는 회화 작품을 단순히 감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장욱진의 선과 화면 구성이 오늘날 디자인 언어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구성됐다.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바라본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특정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근현대미술을 동시대 창작자들의 시선과 연결해 관람객에게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도 선과 형태, 화면의 구성에 집중하며 비교적 편안하게 작품에 다가갈 수 있다.
미술관 2층에서는 상설전 ‘까치를 닮은 화가’가 내년 3월 14일까지 열린다. 장욱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까치를 중심으로 유화와 목판화, 매직화 등 40여 점을 소개한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대표작 2점도 새롭게 선보인다.
까치는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소재다. 장욱진은 까치를 비롯해 나무, 집, 사람, 동물 등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을 자신만의 간결한 조형 언어로 표현했다. 작품 속 까치는 실제 새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한 존재라기보다 자연과 인간, 삶의 정서를 연결하는 상징에 가깝다.
전시는 한 소재가 작가의 작품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복되고 변화했는지를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유화와 목판화, 매직화 등 서로 다른 제작 방식에 따라 까치의 형상과 화면의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관람의 묘미다. 장욱진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관람객에게는 그의 예술세계로 들어가는 친근한 입구가 되고, 기존 애호가에게는 미공개 작품을 만나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장욱진미술관에서 도보로 몇 분 이동하면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에 닿는다. 이곳에서는 조각가 민복진(1927~2016)이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찾아가던 청년기의 치열한 실험을 만날 수 있다.
기획전 ‘청년 민복진’은 2027년 민복진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마련된 아카이브 전시다. 민복진이 조각가로 성장하던 1950년부터 1965년까지의 작품과 드로잉, 사진, 문헌 등 150여 점을 공개한다.
이번 전시의 중심은 완성된 대표작이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다. 한 작가가 처음부터 확고한 예술세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재료와 표현 방식을 시험하고 실패와 변화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복진은 석고와 철사, 청동, 콘크리트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했다. 각 재료가 지닌 질감과 무게, 제작 방식의 차이를 탐구하면서 입체 형태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켰다. 전시장에 소개된 드로잉과 사진, 문헌 자료는 그의 조각이 어떤 구상과 실험을 거쳐 완성됐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관람객은 완성작만 바라볼 때는 쉽게 알기 어려운 작가의 고민과 선택을 따라갈 수 있다. 하나의 조각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생각이 밑그림에 담겼고, 재료의 특성이 형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방식이다. 예술가의 청년기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청년 세대에게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는 민복진 개인의 성장 과정과 함께 한국 현대조각이 자리 잡아 가던 시대적 흐름도 생각하게 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전쟁 이후 사회 전반이 급격한 변화를 겪던 시기다. 제한된 환경 속에서 새로운 재료와 표현 방식을 탐구했던 청년 조각가의 기록은 당시 예술가들이 마주했던 현실과 창작의 열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민복진미술관 열린수장고에서는 상설전 ‘사이의 형태’와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조각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모형을 통해 평면적인 구상이 입체 작품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수장고는 본래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보관하는 공간이다. 최근에는 보존 중심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소장품과 관련 자료를 관람객에게 공개하는 ‘열린수장고’가 새로운 전시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민복진미술관 역시 열린수장고를 통해 관람객이 작품의 제작과 보존, 연구 과정을 보다 가까이에서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조각은 회화와 달리 앞과 뒤, 좌우 등 여러 방향에서 바라봐야 전체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재료를 자르고 붙이거나 틀을 만들고 주조하는 등 제작 과정도 복잡하다. 관련 모형과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경험하면 조각을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공간과 재료, 시간의 결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미술관이 조용히 작품만 바라보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기회가 된다. 작품이 어떤 단계로 만들어지는지를 직접 살펴보면서 조형 원리와 재료의 성질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장흥의 두 미술관이 체험형 문화 나들이 장소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흥 문화 피서의 핵심은 많은 관광지를 서둘러 둘러보는 데 있지 않다. 숲과 계곡, 미술관을 천천히 오가며 하루의 속도를 늦추는 데 있다. 작품을 감상한 뒤 숲길을 걸으면 전시장에서 본 나무와 새, 사람의 형상이 주변 풍경과 겹쳐진다. 자연 속에서 느낀 감각을 미술관 작품을 통해 다시 돌아볼 수도 있다.
두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에는 장흥의 숲길과 계곡을 산책하거나 주변 카페와 음식점을 찾을 수 있다. 자연 감상과 전시 관람, 휴식과 식사를 한 동선 안에서 해결할 수 있어 짧은 일정에도 여행의 밀도가 높다.
지역 관광 측면에서도 문화 피서는 의미가 있다. 계곡 중심의 여름 관광에 미술관과 교육 프로그램을 결합하면 방문객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관광 수요를 주변 상권으로 확산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정 계절이나 물놀이 수요에만 의존하지 않고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장흥관광지의 경쟁력을 넓힐 가능성도 있다.
장욱진과 민복진이라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를 지역의 자연·관광 자원과 연결한 점은 양주만의 차별화된 자산이다. 미술관이 작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시설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 관광을 이끄는 핵심 공간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기록적인 무더위 속에서 여름휴가의 목적도 변하고 있다. 멀리 떠나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서 충분히 쉬고, 새로운 감각과 생각을 얻는 여행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양주 장흥관광지는 계곡의 시원함과 숲의 그늘, 미술관의 고요함을 한 번에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와 맞닿아 있다.
이코노미세계 / 오정희 기자 oknaj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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