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81년이 흘렀다. 그러나 원폭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81년’은 역사의 책장에 남은 숫자가 아니다. 피폭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피해 당사자의 삶을 뒤흔들었고, 그 상처는 자녀와 손자녀 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에 등록된 원폭 피해자와 후손은 모두 1049명이다. 원폭에 직접 노출된 1세대 피해자는 고령화로 점차 줄고 있지만, 피해자의 자녀와 손자녀에 해당하는 2·3세대는 오히려 지원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원폭 피해를 단순한 과거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인권·복지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남종섭 경기도의회 의장은 7일 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경기도 원폭피해자 추모행사’에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피해자와 후손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남 의장은 행사에 앞서 방명록에 “아픔의 역사는 지금도 이어져 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짧은 문장이지만 원폭 피해를 바라보는 경기도의회의 책임과 과제를 압축적으로 담았다는 평가다.
이날 행사는 단순히 과거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생존 피해자와 유가족의 증언을 통해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고통을 확인하고,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되짚는 자리였다.
사단법인 경기도원폭피해자협의회가 주최·주관한 추모행사에는 남 의장을 비롯해 국중범 경기도의회 교육기획위원장, 박상봉 경기도원폭피해자협의회 회장, 이규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 원폭 피해자와 유가족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원폭 희생자에 대한 묵념을 시작으로 표창 수여, 추모사, 원폭 피해 관련 영상 상영, 피해 증언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한편, 피해자와 후손들이 겪어온 삶의 무게를 함께 돌아봤다.
남 의장은 추모사에서 “올해는 원폭 81주년이 되는 해지만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그 시간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라며 “그 고통은 2세와 3세로 이어져 오늘도 반복되고 있고, 우리 사회가 이들의 아픔을 살피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원폭 피해 문제는 오랫동안 한·일 양국의 역사와 외교 문제에 가려져 있었다. 피해자들은 건강 악화와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피폭 사실을 드러내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와 편견까지 감당해야 했다. 피해 사실을 숨긴 채 살아온 사례도 적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정확한 피해 규모와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신체 질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원폭 피해에 대한 사회적 이해 부족, 후손의 건강에 대한 불안, 가족이 오랜 기간 감당한 돌봄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와 가족의 증언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지속적인 조사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현재 경기도에 등록된 원폭 피해자와 후손은 1세대 126명, 2세대 459명, 3세대 464명 등 총 1049명이다. 1세대는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직접 피폭된 피해자를 뜻한다. 2세대는 피해자의 자녀, 3세대는 손자녀를 말한다.
등록 현황을 보면 2·3세대가 모두 923명으로 전체의 약 88%를 차지한다. 1세대 126명의 7배가 넘는 규모다. 원폭 피해자 지원정책의 범위를 직접 피폭자에만 한정해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수치다.
1세대 피해자는 대부분 고령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존자가 줄어들면서 피해 경험과 증언을 기록할 기회도 사라지고 있다. 피해자들의 구술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동시에 2·3세대 후손들이 겪고 있는 건강과 생활상의 어려움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사도 필요하다. 후손 지원정책을 구체화하려면 등록 인원만 파악하는 수준을 넘어 건강 상태와 의료 수요, 경제적 여건, 복지서비스 이용 실태 등을 세밀하게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원폭 피해를 둘러싼 지원정책은 피해의 세대 간 연관성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지방정부 차원의 복지 지원과 함께 국가 차원의 의학적·사회적 조사, 장기적인 추적 관리가 병행돼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된다.
경기도의회는 원폭 피해자 지원을 제도화하기 위해 2019년 ‘경기도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조례에는 피해자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담겼다.
경기도는 조례를 토대로 1세대 피해자에게 생활지원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피해자와 후손을 대상으로 의료 및 휴양·문화 지원사업도 시행하고 있다.
지방정부가 원폭 피해 문제를 지역 복지정책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조례 제정은 의미가 크다. 원폭 피해자를 추모와 위로의 대상에 머물게 하지 않고, 구체적인 행정 지원이 필요한 도민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례와 지원사업이 마련됐다고 해서 피해자들이 겪는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직접 피폭한 1세대와 달리 후손들은 피해를 입증하거나 지원 필요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세대별로 필요한 지원도 서로 다르다.
고령의 1세대에게는 의료비와 생활비, 돌봄 지원이 절실하다. 2·3세대에게는 건강검진과 의료상담, 심리 지원, 피해 실태조사 등이 중요할 수 있다. 모든 세대에 동일한 지원을 적용하기보다 피해자의 연령과 건강 상태, 가족환경을 반영한 맞춤형 정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지원제도를 알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하는 피해자와 후손이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등록된 1049명 외에 아직 피해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거나 지원제도에 접근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피해자단체와 지방정부가 미등록 피해자를 찾아내고, 신청 절차를 안내하는 적극적인 행정을 펼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남 의장은 이날 경기도의회의 역할을 강조하며 제도적 기반을 실질적인 변화로 연결하겠다고 밝혔다. 또 “경기도의회는 원폭 피해자와 후손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왔지만, 피해를 밝히는 일과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다”며 “현장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계속 듣고 필요한 지원이 제대로 닿을 수 있도록 살피겠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와 가족이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경기도와 함께 해법을 찾아가겠다”고 했다.
이 발언은 앞으로의 정책이 공급자인 행정기관의 관점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족의 체감도를 기준으로 설계돼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원사업의 종류와 예산을 늘리는 것 못지않게 실제 당사자가 서비스를 쉽게 신청하고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피해자와 후손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이 선행돼야 한다. 등록 현황을 정기적으로 갱신하고, 세대별 건강과 생활 실태를 조사해 정책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의료 지원도 일회성 검진에서 끝나기보다 장기적인 건강관리 체계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고령 피해자에게는 이동과 진료 과정의 어려움을 줄이는 방안을 마련하고, 후손에게는 건강 이상에 대한 불안을 덜어줄 전문적인 상담과 검진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반영되는 구조도 중요하다. 피해자단체와 경기도, 도의회, 의료·복지 전문가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통해 지원사업의 효과를 점검하고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다. 추모행사에서 나온 증언이 일회성 발언으로 끝나지 않고 예산과 사업으로 이어지게 하는 제도적 통로가 필요한 것이다.
원폭 피해는 전쟁이 민간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다. 동시에 피해자와 후손이 지금도 의료·복지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동안 원폭 피해 문제는 해마다 8월이면 잠시 조명됐다가 다시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생존 피해자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는 추모행사에 머물지 않고 기록과 조사, 의료와 복지를 포괄하는 장기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경기도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만큼 원폭 피해자와 후손의 수도 적지 않다. 도의회가 마련한 조례를 토대로 경기도가 어떤 세부정책을 추진하고, 의회가 이를 어떻게 점검할 것인지가 중요해졌다.
피해자의 증언을 남기고 후손의 어려움을 조사하는 일, 지원 대상과 사업을 현실에 맞게 보완하는 일, 사회적 편견을 없애기 위한 교육과 기억사업을 추진하는 일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81년 전 발생한 원폭 피해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피해자와 후손들이 감당해 온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필요한 지원을 제때 제공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책임이다.
남 의장이 방명록에 남긴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이 추모의 문장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과 예산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원폭 피해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매년 반복되는 위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세계 / 김장수 기자 bmk88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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