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여성이 결혼과 출산, 육아 때문에 직장을 떠나지 않고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기업은 무엇이 다를까. 제도만 놓고 보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유연근무제 등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현장의 체감도는 제도의 유무보다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조직문화에서 갈린다. 제도가 있어도 눈치를 봐야 한다면 여성 근로자의 경력은 언제든 중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 안양시가 지역 기업들과 함께 ‘여성이 오래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드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단순히 여성 고용 인원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조성해 기업의 생산성과 도시의 경쟁력을 함께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안양시는 7일 관내 14개 기업과 ‘안양형 여성친화기업’ 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모·부성 보호 제도와 유연근무제, 성희롱 예방 및 고충 처리 체계 등을 갖춘 기업을 발굴해 지역사회 전반으로 성평등한 일터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마련됐다.
최대호 안양시장은 협약 체결 사실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리며 “여성친화기업은 하나의 인증이 아니라 누구나 경력을 이어가며 오래 일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근무환경을 만들어가는 약속”이라고 밝혔다.
이어 “기업이 성장해야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고, 좋은 일자리가 도시의 경쟁력이 된다”며 “앞으로도 기업의 든든한 파트너로서 기업하기 좋은 도시 안양을 함께 만들어가겠다”고 강조했다.
‘안양형 여성친화기업’ 인증 사업은 전체 근로자가 4명 이상이고 여성 근로자 비율이 20% 이상인 지역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신청 기업 가운데 여성 인력 활용 실태와 일·생활 균형 제도, 조직문화, 근무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대상 기업을 선정한다.
올해 선정된 기업은 네오피스㈜, 비전아이즈㈜, 제이에이취엔지니어링㈜, 제타엑스㈜, ㈜금성, ㈜초원지역전략연구소, ㈜티씨브이, ㈜보승코퍼레이션, ㈜아이웨이, ㈜오상헬스케어, ㈜와이제이(YJ), ㈜유로콘트롤, ㈜토마스, ㈜프리다임 등 14곳이다.
업종과 기업 규모는 서로 다르지만, 여성 근로자가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조직문화를 개선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는 이들 기업이 여성의 경력단절을 예방하는 동시에 남녀 근로자 모두가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모성 보호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모·부성 보호’를 함께 평가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출산과 돌봄을 여성만의 책임으로 인식하면 여성 근로자에게 채용과 승진에서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남성 근로자 역시 육아와 돌봄에 참여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조성해야 실질적인 성평등과 일·생활 균형이 가능하다는 취지다.
유연근무제도 중요한 평가 요소다.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거나 업무 특성에 따라 근무 방식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면 육아와 가족 돌봄을 병행해야 하는 근로자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기업으로서도 숙련된 인력이 회사를 떠나는 것을 막아 신규 채용과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성희롱 예방교육과 고충 처리 체계 역시 여성친화기업이 갖춰야 할 기본 조건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불이익을 걱정하지 않고 신고할 수 있는 절차와 조직의 대응 원칙이 마련돼 있어야 안전한 일터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양형 여성친화기업의 인증 기간은 3년이다. 선정 기업에는 인증 현판뿐 아니라 기업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다양한 지원이 제공된다.
우선 안양시 우수기업 선정 과정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중소기업 육성자금 융자 이자차액보전 지원과 안양산업진흥원이 추진하는 지원사업 공모에서도 가점을 받을 수 있다. 여성친화적 근무환경을 조성한 기업의 노력이 기업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금융과 행정 지원을 연계한 것이다.
안양여성새로일하기센터와 연계한 지원도 이뤄진다. 경력보유여성의 직장 적응을 돕는 새일여성인턴 제도를 활용할 수 있으며, 기업 운영 과정에서 필요한 인사·노무 분야의 전문적인 자문도 받을 수 있다.
안양고용복지플러스센터는 기업 지원사업에 대한 안내와 상담을 제공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지원 내용을 파악해 관계 기관의 사업과 연결하는 맞춤형 서비스도 추진한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비교해 육아휴직자의 업무를 대체할 인력이 부족하고, 별도의 인사·노무 전문 조직을 갖추기 어렵다. 일·생활 균형 제도를 도입하고 싶어도 비용과 인력 문제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방자치단체가 인증에 그치지 않고 금융과 인력, 전문 상담을 함께 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안양시가 여성친화기업을 기업 지원정책의 한 축으로 삼은 것도 이 같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근무환경 개선을 기업에만 맡기지 않고 행정기관과 고용 지원기관이 부담을 나눠 기업의 변화를 돕겠다는 것이다.
여성친화기업 정책의 핵심은 여성 복지를 확대하는 데만 있지 않다. 기업이 필요한 인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숙련된 근로자가 장기간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경제정책의 성격도 강하다.
한 명의 근로자가 퇴사하면 기업은 신규 인력을 채용하고 업무를 교육해야 한다. 새로 채용된 근로자가 업무에 적응하기까지 생산성 저하도 감수해야 한다. 기술과 경험을 갖춘 직원의 이탈이 반복되면 기업 경쟁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출산과 육아, 가족 돌봄 상황에서도 근로자가 경력을 유지할 수 있으면 기업은 축적된 경험과 전문성을 계속 활용할 수 있다. 직원의 조직 만족도와 충성도가 높아지고, 기업 이미지 개선을 통해 우수 인재를 확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구직자가 기업을 선택하는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임금 수준뿐 아니라 근무시간의 유연성, 조직문화, 육아지원 제도, 개인 생활의 보장 여부가 중요한 판단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청년층과 경력보유여성에게 일·생활 균형은 취업과 장기근속을 결정하는 주요 조건이다.
이 때문에 여성친화기업은 여성만을 위한 기업이라기보다 모든 근로자가 존중받으며 오래 일할 수 있는 기업에 가깝다. 육아와 돌봄, 건강, 자기계발 등 근로자마다 처한 삶의 조건을 기업이 합리적으로 수용할 때 일터의 지속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
안양형 여성친화기업 인증 사업은 2023년 처음 시행됐다. 당시 안양시는 공모와 심사를 거쳐 지역 기업 15곳을 여성친화기업으로 선정했다. 2024년에는 8개 기업과 협약을 체결하며 사업을 이어갔다.
단년도 행사에 머물지 않고 매년 새로운 기업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지역 산업현장의 문화를 단계적으로 바꾸는 정책으로 평가할 만하다. 인증 기업이 늘어나면 기업 간 경험을 공유하고 우수한 제도를 확산할 기반도 커진다.
시는 기업 간 네트워크를 활성화해 여성친화적 조직문화와 제도 운영 사례를 공유할 방침이다. 규모와 업종이 다른 기업들이 각자의 시행착오와 성과를 나누면 개별 기업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기업 현장의 규제를 발굴하고 개선하는 작업도 병행할 계획이다. 최대호 시장은 금융 지원과 기업 간 네트워크, 규제 개선 등 기업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안양시는 여성친화도시 정책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시민참여단을 운영해 여성친화적 관점에서 정책을 점검하고 개선안을 제안받는 등 시민 참여 기반을 넓혀 왔다. 여성친화기업 인증은 이러한 정책을 행정과 공공 영역에서 민간 일터로 확장하는 연결고리라고 볼 수 있다.
여성친화기업 정책이 실질적인 성과를 내려면 인증 기업의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이 갖춘 제도가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지 지속적으로 살펴야 한다.
육아휴직과 유연근무제가 사규에 명시돼 있더라도 근로자가 인사상 불이익을 걱정해 사용하지 못한다면 정책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관리자와 동료의 인식, 대체인력 확보 여부, 휴직 후 업무 복귀와 승진 과정까지 함께 점검해야 한다.
인증 기간인 3년 동안 기업별 개선 과정을 관리하는 사후 점검 체계도 중요하다. 육아휴직과 유연근무제 이용 현황, 여성 근로자의 근속 기간, 관리직 진출 비율, 직장 내 고충 처리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인증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근로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기업이 제출한 자료뿐 아니라 실제 근무하는 직원들이 느끼는 조직문화와 제도 이용의 어려움을 확인해야 현장과 인증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다.
좋은 사례를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도 과제다. 여성친화기업의 제도와 성과가 널리 공유되면 아직 참여하지 않은 기업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인증 기업에는 우수 인재를 끌어들이는 홍보 효과를 제공하고, 구직자에게는 기업을 선택할 수 있는 신뢰성 있는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도시 경쟁력은 대규모 개발사업이나 교통망 확충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이 안정적으로 일하고, 기업이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며, 근로자가 삶의 변화에도 경력을 이어갈 수 있어야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
여성친화기업 정책은 기업 지원과 고용, 저출생 대응, 성평등 정책이 맞닿는 지점에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넓히고 경력단절을 줄이는 동시에 기업의 인력난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방정부가 주목할 만한 정책 수단이다.
안양시와 14개 기업이 맺은 이번 협약은 출발점이다. 협약이 현판과 인증서에 머무르지 않고 근로자의 일상적인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 기업이 제도를 만들고, 근로자가 부담 없이 이용하며, 행정기관이 비용과 인력 문제를 뒷받침하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돼야 한다.
최 시장이 강조한 것처럼 기업의 성장은 좋은 일자리를 늘리고, 좋은 일자리는 도시의 경쟁력을 높인다. 이제 안양형 여성친화기업의 성패는 ‘몇 곳을 인증했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근로자가 경력을 지키며 오래 일하게 됐느냐’로 평가받아야 한다.
일과 가정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일터, 남녀 모두가 돌봄에 참여하면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 안양시가 추진하는 여성친화기업 정책이 지역의 고용문화를 바꾸고 기업하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실질적인 동력으로 이어질지 기대된다.
이코노미세계 / 이해창 기자 okna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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